• 옛날의 그 집

  • 박남석 | 2008.05.15 15:05 | 조회 2120

    옛날의 그 집 - 박경리


   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

   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

    십오 년을 살았다

   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

   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

   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

    이른 봄

   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

    다행이 뜰은 넓어서

   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

   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

    정붙이고 살았다

   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

   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

    무섭기도 했지만

    책상 하나 원고지, 펜 하나가

    나를 지탱해주었고

   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

    그 세월, 옛날의 그 집

    그랬지 그랬었지

    대문 밖에서는

  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.

  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

  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

    모진 세월 가고

   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

  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


    - 박경리의 마지막 시, 2008년4월 <현대문학> 발표 -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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